2년 전 친구 모임이 있어서 술 한잔하고 커피 한잔 마시려고 골목길을 걷다가 유리창 너머로 걸려있는 미술 작품들을 보았다. 그리고 좀 더 나이가 들면 미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은 예전의 생각이 떠올랐다. 얼마쯤 지나서 그 결심을 현실로 옮기기로 마음먹고 기억을 더듬어 하얀고래 미술교습소를 찾았다. 웃는 얼굴로 나를 맞아주시는 고선생님을 마주하고, 간단한 질문 두어 개를 주고받는 것으로 그림 그리기 입문 과정을 통과했다.
다음 주 금요일 첫 번째 방문에서 캔버스를 받고 어떤 그림을 그릴지 선택하고, 그걸 화면에 스케치해 보라는 것이 시작이었다. 스케치는 중학교 이후로 처음 해보는 것. 꽤나 막막했던 기억이 있다. 대충 그려진 스케치를 고선생님이 다시 다듬어 주시고, 거기에 초록색(Sap Green) 물감을 칠하는 걸 한번 보여주시고 그걸 따라 하는 것이 내 첫날이었다.
그때부터 1년 반이 지났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나 싶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삶은 조금 더 단조로워지는 느낌이다. 삶의 반경이 기존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탓일까 싶다. 요새 한주가 지났다는 기준은 금요일 저녁 화실 방문과 토요일 오전의 골프 연습 이 두 개다. 생각보다 이 두 가지 일상이 금세 다가온다. 화실에 나가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시회 얘기를 들었었다. 먼 얘기인가 싶었는데 어느새 일주일 앞이다. 내 그림이 거기에 함께 걸린다는 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을 실감하게 해 준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그 결과물이 존재한다는 것에 뿌듯하다.
카탈로그에 포함된 내 그림들 이미지다. 그림보다 사진이 더 근사하게 나왔다. 저렇게 배치해 놓으니 멋지다. 카탈로그 설명에 고선생님께 고맙다는 글을 보냈었는데 배치가 애매해서 빠졌다고 한다. 고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저 정도의 결과물을 만들지 못했을게 분명하다. 여기에라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드리고 싶다.
그림이라는 멋진 취미가 생겼다. 어느 지점이 내 한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늘어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것도 행복하다. 여전히 캔버스를 마주하고 스케치를 시작할 때면 이걸 제대로 끝낼 수 있을까 싶긴 하다. 뭐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0. 올바른 의사 결정은 어느 정도의 가치를 가지는가?
국가나 회사의 수많은 결정들은 토론을 거치건 그렇지 않건 결국 최종 결정권자의 의지에 따르게 될 것이다. 이 판단의 결과가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이 결정의 가치를 어느 정도로 보아야 할까? 그리고 이 선택이 더없이 중요하다면, 둘 또는 그 이상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선택하는 것과 선택 이후에 결과를 이끌어내는 일, 이 두 가지의 가치 비율은 어떤 식으로 결정하는 것이 좋을까?
사회에서 흐름을 결정하는 위치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높은 보상이 주어진다. 물론 선택이 실패할 경우 본인을 포함 선택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이 위험에 빠질수도 있고 더 많은 비난이 선택한 이에게 쏟아질 것이다. 반대로 성공한다면 그 선택을 찬양하고, 선택을 한 사람에게 환호가 쏟아질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선택의 기회 역시 그 사람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어 본다면 뭐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런 시스템이 효과적인 선택을 보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선택에 대한 부가적인 보상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여기에 의문을 가지고 아래와 같은 사고 실험을 진행해 본다.
1. 50% 확률의 선택
이 사건은 대항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무역선이 출항하고 향신료를 가득 싣고서 본국으로 향하는 배가 있다. 이 배에 선적된 물품을 판매하면 100 두카트-베네치아 공화국 금화-의 수익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배는 항해 도중 풍랑을 만나게 되고 거친 바람 속에서 위험한 해협을 통과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이 해협을 통과할 확률은 50% 정도로 보인다. 선장은 선원들에게 제안한다. 내가 이 해협을 안전하게 통과시킨다면 내 몫으로 전체 수익의 20%를 달라고 한다. 선원들은 절반의 확률로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에서 선장의 제안이 크게 나쁘지 않아 보여서 찬성하고 선장을 도와서 해협을 무사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항해에 집중한다. 덕분에 배는 성공적으로 항구에 도착했고 선장은 약속대로 수익의 20%를 차지할 수 있었다. (선원의 수는 50명 정도로 가정한다.)
질문: 선장이 제안한 20% 수익은 적정하다고 생각하는가? 적정하지 않다면 선장의 몫은 어느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2. 10% 확률의 선택
위 문제와 똑같은 조건이다. 다만 달라지는 점은 풍랑속에서 해협을 성공적으로 통과할 확률이 10% 라는 점이다. 이 경우 선장은 자신의 항해에 대한 대가로 어느 정도를 요구해야 할 것인가? 50% 확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높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질문: 선장은 선원들에게 자신이 몇 % 이익을 가져간다고 얘기 하는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 50% 확률일 때 보다 더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10% 확률에서 성공적으로 항해를 마친 선장이 50% 확률의 선장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정당한 것일까?
3. 50% 확률 게임에서 60% 성공률이 기록 되었다면...
다시 1번 문항으로 돌아가서 항구에 도착한 선원들은 같은 시기에 출항한 배들 수십 척이 해당 풍랑을 해치고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100척이 출항해서 같은 조건의 난관을 통과한 후 60척이 도착한 것이다. 각 배의 선장들은 모두 20%의 인센티브를 얻었다. 그러자 선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다. 50% 확률에서 60%의 배가 성공적으로 돌아왔다면 (일반선장 n명 * 0.5) + (특별한 선장 m명 * 1) = 60, n + m = 100 이렇게 두 가지 수식을 m = 40을 구할 수 있다. 즉 100% 확률로 항해를 성공시킨 선장이 존재한다면 60명 중 1/3인 20명 밖에는 되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각 선장들이 어느 정도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일반인이라면 50% 확률로 통과할 수 있는 구간을 60% 확률로 통과한 것이고, 항구에 도착한 60명의 선장들은 도착하지 못한 40명의 선장들보다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이다.
만약 좀 더 실험을 해볼 수 있다면, 일반 선원에게 키를 쥐어주고 항해를 했을 때의 확률도 구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확률이 60% 거나 아니면 그 근처라고 한다면 우수한 선장이 항해를 성공시켰다는 것은 그저 불확실한 미래로 인해 발생한 미신이었을 뿐이라 결론이 날 것이다. 그리고 선원들은 선장에게 별도의 인센티브를 주는 것을 거부할 것이다.
4. 10% 확률 게임에서 12% 성공률이 기록되었다면...
다시 성공 확률 10%를 가지고 사고 실험을 해보자.
항구에 도착한 배가 100척 중 12척이 도착했다면, 98척의 배는 10% 확률로 나머지 2척은 100% 확률로 도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확률이 실재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100척의 선장들이 12% 성공 확률로 항해를 했을 수도 있고, 50척은 10% 성공 확률로 나머지 50척은 14% 성공 확률로 항해했다고 해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즉 결론만으로 각 선장의 항해가 적절했는지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위 50% 예처럼 선원들이 항해했을 때 확률과도 비교해 보야야 한다. 그리고 결론이 도출된다면 비로소 선장이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받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위 50% 상황과 비교해서 10%를 통과한 선장들이 더 많은 인센티브를 받아야 하는지 역시 알 수 없다.
5. 반복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에게 다음 선택을 맡겨야 할 것인가?
위 예에서 얘기하고 싶은 점은 정확한 확률이 결정되지 않는다면 단지 선택의 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정확한 선택을 통해서 결승점에 도달한 사람들이 인센티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50% 확률 게임으로 돌아가서 100만 명이 50% 확률의 동전 던지기를 한다면 누군가는 20번 연속 앞면이나 뒷면을 볼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결과만 가지고 21번째가 연속해서 앞면과 뒷면이 나오는 것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경우로 본다면 우리는 연속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에게 다음 선택을 맞기는 경우가 많다. 계속해서 실패하는 선택을 반복하는 사람에게 다음 선택을 맞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능력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어도 된다. 나는 이 사고실험에서 능력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능력에 대한 부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연속적으로 선택에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속적인 성공의 경우 그 선택으로 인해 인센티브가 주어진다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성공은 보다 많은 인센티브를 보장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또한 확률이 낮은 선택을 결정한 기회를 가진 사람에게 더 높은 인센티브가 주어질 가능성 역시 높을 것이다. 그 선택이 어디까지가 능력이고 어디까지가 운에 맡겨진 것인지를 떠나서 말이다.
5. 확률을 알 수 없는 경우
우리는 일상에서 훌륭한 선택의 결과들을 마주한다. 작게는 히트 상품에서 크게는 기업이나 국가의 성공까지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이르게 한 선택들을 찬양한다. 그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이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커다란 모집단을 두고 실험을 한다면 반드시 크게 성공한 케이스와 크게 실패하는 케이스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모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한 표본을 면밀히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성공한 소수의 예만 가지고 선택의 효율성을 입증할 수 있을까?
매년 벼락처럼 성공한 기업들이 등장하는 것처럼, 매주 극한의 낮은 확률을 가진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도 등장한다. 그 둘 사이의 차이점이 있다면 로또는 성공할 확률이 정해져 있고, 1등에 당첨된 사람들의 확률이 정해진 성공 확률에 수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로또는 운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다음 선택을 이미 로또 1등에 성공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는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공한 제품이나 기업의 경우에는 어떨까? 우리는 그 성공에 이른 선택들의 정확한 확률을 알 수 없다. 단지 선택이 성공했다는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선택에 성공한 사람의 경우 다음번 선택에 성공한다면 보다 높은 인센티브가 주어질 가능성이 높다.
사회가 복잡할수록 선택의 확률을 추정하는 것은 어렵다. 설혹 추정치를 제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얼마나 정확한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주요한 선택들은 반복적인 시험을 통해서 확률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젤렌스키나 푸틴이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생하지 않았을지 확률을 구하는 것이 가능할까?)
내 사고 실험은 여기까지다. 다시 이전의 질문을 던져본다.
1. 50% 성공확률을 성공시킨 선장에게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주어야 하는가?
2. 10% 성공확률을 성공시킨 선장은 50% 성공확률의 항해를 성공시킨 선장보다 인센티브를 더 받아야 하는가?
3. 10% 성공확률을 성공시킨 선장에게 다음 항해를 맡겨야 하는가? 그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지막날은 비행기가 출발하는 수요일이지만 이날이 여행의 실질적인 마지막 날이다. 오후 5시 비행기라 내일도 시간이 많기는 하지만, 여행에서 보거나 느끼고 싶었던 목표들은 이날까지 진행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미뤄두었던 이스탄불 야경을 보는 걸 위주로 일정을 잡아 두었다. 오전에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둘러보고 잠시 쇼핑몰에 들렀다가 3시 30분에 시작하는 '이스탄불 미식 여행'에 합류하는 것이 아침에 목표로 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았던 여정으로 인해서 이날 일정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가려고 숙소에서 나와서 M2 라인 Sishane 역으로 나왔다. 지하철로 두 코스를 가서 내렸다. 그리고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는데 옆에서 한국말로 말을 건다. 혹시 한국분 아니냐고 묻는다. 맞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하더니 자신은 그랜드바자르 주변의 고서적 파는 곳에 가려고 여기서 내렸다고 한다. 길이 비슷해서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걸었다. 독일에서 제빵공부를 하기 위해서 7년 전에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 지금은 30대 중반이라고 얘기했다. 휴식차원에서 10년 만에 이스탄불을 방문했다고 한다. 나름 얘기가 잘 통해서 모스크까지 동행 후 차 한잔을 제안해 왔고 나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남는 시간에 쇼핑몰을 둘러본다는 오후 일정이 그리 탐탁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일단을 함께 모스크 쪽으로 이동했다.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는 한가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안내글에는 규모는 아야 소피아나 블루 모스크 보다는 적지만, 흠잡을 곳 없는 건축방식으로 지어졌다고 나와 있다. 실제 모스크의 느낌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블루 모스크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모스크에 딱 필요한 정도의 장식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어서 좋았다. 그렇다고 수수하게 지어진 모스크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곳이 관광객들이 주로 몰리는 지역과 떨어져 있어서인지 사람도 많지 않았다. 이 모스크는 갈라타 다리를 걷다 보면 우측 언덕으로 위치하고 있다. 이 모스크를 배경으로 한 사진을 찍으면 좌측 편에 조그만 모스크와 어울려서 이곳이 터키구나 싶은 이국적인 느낌의 사진을 만들어 준다.
모스크를 둘러본 후 지하철에서 만난 태정씨가 근처 찻집으로 안내한다. 원래는 이곳에서 아침을 먹을 얘정이었다는 얘기와 함께 루프탑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었고 한쪽 편엔 마르마라 해가 반대편엔 쉴레이마니예 모스크가 보인다. 혼자서 이런 곳에 올라와 차를 마실 리가 없기에 우연한 인연 덕분에 터키 젊은이들의 문화 한 귀퉁이를 경험할 수 있었다.
카페라테 한잔과 바클라바를 시켰다. 차가운 걸 시킨다는 걸 깜빡해서 뜨거운 커피가 나왔다. 터키 여행 중 대부분은 주스나 홍차를 마셔서 커피는 처음 먹는 거다. 우유맛 커피처럼 맹숭맹숭하다. 바클라바를 안 먹어 봤다고 얘기해서 태정씨(제빵사가 직업이어선지 나 보다 이런 쪽에 관심이 많다)가 한번 먹어보라고 시켰는데 여행 도중 몇 번 먹어본 디저트였다. 이날 오후 미식여행에서도 느꼈지만 터키 여행 중 신기해 보이는 것은 한 번씩 먹어봤었는데 그래서 내가 이름만 모를 뿐이지 터키에서 알려진 음식이나 디저트를 대충 다 먹어본 듯하다. 단맛이 너무 강한 디저트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역시나 바클라바는 내 입맛에는 너무 달았다. 카페에서 사진 몇 장을 찍고 서로의 여행 스타일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태정씨 여행 스타일을 듣고 있으니 저런 식의 여행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이번 여행에서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면서 시간을 보낸 듯하다.
12시가 다 되어서 각자의 일정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커피숍을 나왔다. 처음 내린 지하철역 앞에서 악수하고 서로의 여행을 격려하면서 헤어졌다. 쇼핑몰에 가기엔 시간이 애매해져서 나는 근처에 있는 발렌스 수도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로마의 수도 시스템에 대해선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실제로 제대로 남아있는 유적을 본 적은 없기 때문이다. 어제 본 예레바탄 사라이까지 수로가 연결되어 있었다는 글을 읽었으니 아마도 그 수로중 일부가 아닐까 추측해 봤다.
10분 정도 걷자 거의 온전한 모습의 수로가 등장했다. 도로 한 복판에 수로가 차들을 통과시키는 문처럼 서 있었다. 수도교를 유지한 상태로 도로가 만들어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도교를 통과해서 잠시 바다 쪽으로 걷다가 길을 건너서 다시 수도교 방향으로 돌아와서 수도교를 주욱 돌아보았다. 물이 통과하는 구조를 보고 싶었지만, 위로 올라갈 길이 없어서 아래를 돌아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수도교로 인해서 만들어지는 그늘은 찻집 테이블이 주욱 놓여있고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수도교를 보고 나서 바다 쪽으로 걸었다. 시간을 보니 중간에 점심을 먹고 천천히 걸으면 3시 30분 전에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점심은 길을 걷다가 평점이 괜찮은 동네 음식점에서 먹었다. 터키식 음식점이었다. 수프와 빵 그리고 고기를 곁들인 밥이 나왔다. 수프는 이전에 소금호수 투어 때 먹어본 기억이 있다. 뭘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먹을 만은 한데 엄청 끌리는 맛은 아니다. 한 시간 정도 걸으려면 든든히 먹어둬야 해서 수프를 제외하면 나머지 음식은 모두 먹었다. 걸어 내려오는 길에 조그만 동네 이슬람 사원에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 들렀다. 손을 씻고 나오니 요금이 3리라라고 한다. 역시나 이런 곳도 요금을 받는구나 싶어서 살짝 웃었다.
아타튀르크 다리를 건널까 하다가 옆쪽에 다리 한가운데 Halic 역이 있는 다리를 건너리로 했다. 아침에 오면서 다리 한가운데 지하철 역이 왜 있을까 의아해했었던 그곳이다. 지하철이 다니는 중앙 양 옆으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5미터 폭의 다리가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지하철이 통과하면 사람이 걷는 다리가 살짝 흔들렸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관계로 불편함을 느끼면서 걸음을 재촉해서 다리를 건넜다. 사진 몇 장을 찍었는데 생각보다 그리 예쁘진 않다.
다리를 건너서 건너편 강변을 따라 걸었다. 중간에 셀카 몇 장을 찍으면서 쉬었다 가다를 반복했다. 3시 30분 까지는 좀 여유가 있었다. 좀 쉬다가 갈라타 다리를 한번 더 왕복했다. 처음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이 다리를 걸으면서 찍은 사진들이 맘에 들어서 다른 구도로 몇 장 더 찍어두고 싶어서였다.
미식투어 시간에 맞춰서 카라쿄이 터미널로 향했다. 시간이 가까워지자 여성 가이드분이 다가와서 투어 얘기를 하고 나는 맞다고 답을 건넸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본 한국 가족(부부와 두 아들)도 역시나 오늘 투어 일행이다. 시간에 맞추어서 어머니와 딸 두 분이 합류한다. 터키 현지인 가이드 포함해서 9명이다. 터키도 여행 가이드를 하려면 반드시 현지인 가이드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현지인 가이드가 포함되었다고 얘기해 준다.
여행은 내가 어제 먹은 고등어 케밥을 먹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아시아지구로 건너간 다음 홍합밥, 맛집에서 저녁 식사, 바클라바, 꿀을 탄 요거트, 딜라이트를 경험해 보는 경로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석양을 감상하면서 돌아오는 코스로 이뤄졌다. 나는 음식보다는 이곳 야경을 보는 것이 주목적이긴 했다.
홍합밥을 제외하면 나머지 음식들은 대부분 한 번씩은 먹어본 것들이었다. 이날 먹은 음식들이 나름 유명한 맛집들이어서 맛에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홍합밥은 혹시나 먹고 탈 나면 어떨까 싶어서 먹지 않았었는데 이곳에서 처음 맛봤다. 가이드 추천 맛집이라선지 맛은 괜찮았다. 레몬을 뿌려서 먹으면 거의 레몬향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고, 레몬을 뿌리지 않으니 홍합의 맛이 살짝 느껴졌다. 먹을 만은 했다.
저녁식사로 다양한 터키 음식을 조금씩 맛볼 수 있었다. 넷플릭스에 나온 맛집이라고 가이드가 얘기했는데 음식은 나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엄청 맛있다는 느낌까진 못 받았다. 다양한 터키 음식을 조금씩 맛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새콤한 닭고기 요리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터키 음식은 이런 새콤한 요리가 많다는 얘길 들었던 듯하다.
식사 후에 먹었던 디저트류 중에서는 꿀을 탄 요거트가 괜찮았다. 이곳 꿀의 품질이 매우 좋다는 얘기를 가이드가 전해줬는데 그럴만한 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간 분들은 이곳에서 꿀을 여러 개씩 샀다. 나는 그냥 조용히 구경만 했다. 호주 여행에서 꿀을 사갔다가 거의 그대로 집에 진열만 해 두었다가 몇 년 후 버렸던 경험이 있어서 평소 먹지 않는 건 사지 않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다.
디저트를 먹고 카라쿄이 선착장에 가기 위해서 반대편 선착장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있었고 석양이 예뻤다. 다음번에 터키에 온다면 이곳에 숙소를 잡고 저녁에 이곳 선착장에서 야경을 구경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돌아오는 배에 올라타서 카라쿄이 선착장으로 향했다. 배에서 본 야경은 멋졌다. 별다른 비용을 치르지 않고 시간에 맞춰서 배를 타는 것만으로도 이스탄불 야경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었다. 카라쿄이 선착장에 돌아오니 9시가 다 되었다. 가이드와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미식여행은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길에 가이드의 조언에 따라서 갈라타탑 야경을 보기로 했다. 일단 갈라타다리 주변의 야경 사진 몇 컷을 찍고 나서 갈라타탑으로 이동했다. 입장권을 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타워 꼭대기로 올라갔다. 타워 꼭대기에는 타워 주변을 바깥쪽으로 돌 수 있도록 난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역시나 나는 이런 높은 곳이 질색이다. 그래도 올라왔으니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전체적인 야경의 모습은 좋았지만, 높은 곳에서 바라보다 보니 일반적인 도시 야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시 야경을 보는 일정을 잡는다면 그냥 갈라타 다리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할 듯싶다. 가이드가 갈라타 다리와 함께 야경을 볼 수 있는 카페 같은 곳이 있다는 얘길 했었는데 그런 곳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Note. 뤼스템 파샤 모스크는 야경이 가장 예쁜 모스크라고 가이드가 얘기했었다.
Note.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야경은 갈라타 다리에서 본 야경 하고, 카라쿄이 선착장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본 야경이다.
갈라타 타워에서 잠시 머물고 바로 나왔다. 핸드폰 배터리가 거의 바닥이다. 그때 오전에 만난 제빵사가 추천해 준 와인집이 떠올랐다. 마지막 저녁이라는 것 때문이었을까 평소라면 혼자서 와인을 마시러 가지 않았을 텐데 그냥 들어갔다. 풀바디 와인을 시키고 30분 정도 기다렸다 먹는 게 좋다고 해서 기다리면서 와인을 두 잔 더 마셔서 세잔이나 마셔 버렸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유명한 터키 와인을 물어보고 직원이 소개해준 와인 한 병을 덜컥 한 병을 덜컥 사버렸다. 와인바 가격이니 소매가 보다 훨씬 비싼 가격임에 분명할 텐데 말이다. 하필 핸드폰 배터리가 0%가 돼버리는 바람에 악운이 겹쳤다. 와인 이름을 알았으미 가격만 확인했다면 담날 공항에서 샀을게 분명한데 말이다.
와인바에서 나와서 호텔로 향했다. 핸드폰이 안 켜져서 구글맵으로 내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술도 살짝 취한 상태라서 걱정이 앞선다. 호텔로 잘 찾아갈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조금 걸으니 아는 길이 나와서 어렵지 않게 호텔로 돌아왔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은 하루가 돼 버렸고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남은 하루 이곳에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고 가는 것 같으니 후회는 안남을 듯 싶다.
한 달간 통계를 보니 평균 10km 정도씩 매일 걸었다. 혼자서 일정을 정하고 구경하고 또 다음 일정을 정하고의 반복이었지만, 장소가 매번 바뀌는 통에 동일한 반복은 없었다. 지난 여정을 돌이켜보니 내 예상보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여행기를 마무리하려고 보니 단조로운 일상의 1년보다 더 많은 여행의 기억들이 스치듯 지나간다. 언제일지 모를 다음번 여정을 기약하며 이번 여행기는 여기서 마친다.
Note. 체력이 부족해진 탓에 여행에서 하루의 일정은 대부분 오후 5~6시면 끝났다. 덕분에 매일 저녁 일과가 여행기를 쓰는 게 돼 버렸다. 여행 후반부에는 호텔에 돌아오면 의무감에 그날그날의 일정들을 남겨 두었다. 덕분에 한 달간의 여행 기록을 온전하게 남길 수 있었고 나름 충실한 여행기를 쓸 수 있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해서 트램을 타고 오갈 때 항상 길게 줄을 서 있는 곳이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아야 소피아고 나머지 하나는 예레바탄 사라이 였다. 아야 소피아의 줄은 짐 검사 때문에 생기는 줄이고, 예레바탄 사라이의 줄은 입장권을 끊기 위한 줄이다. 온라인으로 예매한 사람들이 좀 더 빨리 들어가는 것 같기는 하다. 내가 줄을 서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호텔서 좀 일찍 출발하는 것이었다. 뭐 엄청 빨리는 아니고 이날이 월요일이기 때문에 9시 30분 정도 호텔을 나섰다. 트렘을 타고 술탄아흐메트 역에서 내렸다. 10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월요일이고 이른 시간여서 인지 줄은 길지 않았다. 내 앞에 열명정도 있었던 듯하다. 입장권을 끊고 안으로 들어섰다.
첫눈에 든 생각은 '엄청나다'였다. 엄청난 크기의 지하 공간에 거대한 기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물은 약간 깔아 두고 기둥들 사이사이에 조명을 설치해 두어서 마치 미궁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이 공간의 역할을 찾아보니 지하 저수지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물을 저장해 두거나, 큰 비가 왔을 때 물을 흘려보내는 역할로 사용했다고 한다. 물이 가득 차면 과거 콘스탄티노플(동로마 제국의 수도) 시절에 3달 동안 이 물로 시민들의 식수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더불어 난공불락의 도시를 만드는데 일조했을 듯하다. 과거에 물을 저장해 둘 때는 물고기를 키웠다고 한다. 먹을 수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기둥들 사이로 걸을 수 있도록 철로 만든 격자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 길을 따라서 사진을 찍으며 지하 공간을 구경했다. 지하의 기둥들은 화려한 기둥도 있고 단순한 문양의 기둥도 있었다. 코린트식 기둥을 보면서 굳이 지하에 저런 식의 화려한 기둥을 만든 건 어떤 이유였을까 생각했었다.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이 공간의 기둥들은 당시 여러 지역의 건물 기둥을 가져다가 만든 것이란다. 그것이 이 공간을 구성하는 기둥들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유였다.
지하 공간을 둘러보고 나오니 사람들이 줄을 서는 끝쪽 공간으로 나왔다. 나와서 보니 지하 공간이 생각보다 더 넓구나 싶었다.
시간은 11시다. 웬만한 곳은 대충 다 둘러본 후라 뭘 할까 하다가 지난번 톱카피 궁전을 둘러볼 때 빼먹었던 아야 이리니를 보러 가기로 했다. 톱카피 궁전으로 향하는 문을 통과해서 아야 이리니 방향으로 걸었다. 티켓을 또 끊어야 한다는 게 아깝지만 별 수 없다. 티켓 요금은 180리라. 생각보다 비싸다. 톱카피 궁전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볼거리가 좀 있나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본 건물의 실내를 둘러보는 게 전부다. 그것도 안쪽은 공사 때문에 천으로 덮여 있고, 2층은 올라갈 수 없다. 15000원 가까이 입장료를 받았는데 이건 너무한 듯싶다. 보통 이 입장권은 톱카피 궁전 입장권에 포함되어 있어서 나처럼 별도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난번에 시간이 급해서 못 보고 지나친 게 못내 아쉽다.
이곳을 나와서 터키 이슬람 아트 뮤지엄으로 향했다. 이곳도 지난번 블루 모스크만 보고 생략했던 곳이다.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 율법 때문에 이슬람 미술이나 조각이 거의 없어서 이슬람 예술은 좀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톱카피 궁전에서도 미술품은 별로 보지 못했다. 대신 캘리그래피 작품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돌마바흐체 궁전은 그래도 그림들이 좀 있었다. 대부분 그림들은 사실적인 사건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다.)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은 대부분 자기, 식기, 촛대, 가구 등등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코란, 카펫, 의류 등등이 약간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기하학적 문양이나 캘리그래피를 활용해서 장식된 것이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슬람 문화의 한계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기하학적 문양들로 구성된 화려함이 볼만 하기는 했다.
여기까지 돌고 나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해서 근처 맛집을 찾아 나섰다. 구글 평점은 나쁘지 않았지만, 내 입맛에는 그냥 그랬다. 한국이라면 두 번 올 것 같지는 않지만, 이곳 기준이라면 평균은 하는 듯하다. 빵 대신 구운 난을 제공해 줘서 그건 마음에 들었다.
식사를 하고 해변가 쪽으로 내려간 후 갈라타 다리를 향해서 해변을 빙 둘러서 걸었다. 이 길을 택한 이유는 이곳 해안에 성벽이 있고, 중간중간 역사적 유적이 조금씩 있기 때문이다. 이 길은 걷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길의 상당 부분이 공사 중이었다. 심하게 파손된 성벽들을 보완하는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이미 공사가 진행된 구간을 보면 복구하는 편이 더 나아 보이긴 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구간의 공사가 다 끝나고 나면 이 길을 다시 한번 걸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길을 빙 둘러서 걸으면 끝부분에 귈하네 공원으로 이어진다. 톱카피 궁전에서 바라보았을 때 바다가 바로 보여서 몰랐는데 그 아래쪽은 이렇게 성벽과 공원이 감싸고 있는 구조였다. 지난번 공원을 처음 왔을 때 톱카피 궁전의 반대쪽 방향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왜 그럴까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이 공원 역시 궁전의 한 부분이었을 듯싶다. 공원 한 귀퉁이 튀어나와 있는 8 각형 구조 건물이 술탄이 거리를 바라볼 때 사용되었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공원을 둘러보는걸 마지막으로 이스탄불에서 둘러봐야 할 것들은 대략 다 본 듯하다. 남는 시간도 보낼 겸 선물도 살 겸 해서 '그랜드바자르'로 향했다. 트렘을 타면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중간에 도자기로 만들어진 냄비받침 몇 개를 샀다. 식탁보로 쓰면 딱일 듯 보이는 자수가 된 천을 보았는데 가격이 비싸서 포기했다. 여기 상품들은 부르는 게 값이라서 정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부르는 가격이 비싼 건지 싼 건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하는 이유가 있기는 하겠지만, 물건의 가격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선 선뜻 물건을 사기가 망설여지는 건 사실이다. 결국 다른 물건 사는 건 포기하고 냄비받침 몇 개를 가지고 그랜드바자르를 빠져나왔다.
Note. 다음날 저녁 여행 때 가이드가 말하기를 대략 부르는 값에서 절반으로 깎은 후 조금씩 올려가면서 가격 협상을 하면 된다고 했다.
트렘을 타고 숙소 앞 역에서 내렸다. 또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올라가는 길에 가죽제품 판매점이 있어서 들렀다. 터키가 가죽제품으로 유명하고 또 싸다고 해서 혹시나 싶어서 들린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맘에 드는 가죽가방을 하나 구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어서 아이쇼핑만 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적당히 마음에 드는 가방을 하나 찾았다. 가격은 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당한 가격이다. 여행에서 내 선물을 하나 샀으니 만족이다.
내일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모레 한국으로 돌아간다. 숙소로 들어가서 뭘 할 건지 고민해 봐야겠다.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볼건지 아니면 터키의 쇼핑몰을 한번 둘러 볼건지 둘 중 하나를 택해야겠다.
Note. 냄비받침으로 산 타일들을 한국에 돌아와서 나무로 만든 냄비받침대를 사서 시중에서 파는 냄비받침처럼 만들었다. 약간의 수고가 더 들어가긴 했지만 결과물을 꽤 괜찮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돌마바흐체 궁전을 가려고 했는데 조금 늦어져서 호텔에서 9시 30분 정도 길을 나섰다. 하늘은 흐렸다. 빗방울이 살짝 흩뿌리더니 길을 조금 내려가니 우산을 써야 할 정도로 비가 내렸다. 잠깐 내리다 말겠지 생각했다.
트렘을 타고 두 코스를 가서 Kabatas 역에서 내렸다.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이 있다. 18세기 중반에 재건된 이 건물은 그 이후로 오스만 제국의 후기 황제들과 아타튀르크 시대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곳 내부 촬영이 안되어서 외부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이곳에는 18~19세기 까지 유럽 귀족 문화의 최고 걸작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르마라 해 바로 옆에 위치한 궁궐 건물 그 자체도 화려했지만, 궁궐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구성품 하나하나가 최고의 사치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 당시 오스만 제국의 국력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원래 이런 식의 화려한 궁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워낙 높은 수준의 가구, 카펫, 샹들리에, 식기 등등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관람 순서는 술탄이 집무를 보았던 공간들을 먼저 돌아보고, 그리고 건물을 나와서 반대편으로 돌아서 왕비와 궁녀들이 거주한 하렘을 보는 순서였다. 하렘은 술탄의 집무 공간보다는 덜 화려했지만, 여성스러움이 느껴지는 물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회화 박물관을 들릴까 하다가 궁정 내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봤을 때 딱히 내가 좋아할 만한 그림이 없겠다 싶어서 그냥 바로 나왔다. 배가 고픈 것도 한몫했다.
점심을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루멜리 히사르 근처까지 가서 먹는 게 낫겠다 싶었다. 구글맵을 검색하니 버스를 추천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한참을 기다려서 40T 버스를 탔다. 버스는 바다를 끼고 30분 정도를 달려서 목적지에 내려 주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구글맵에서 추천하는 식당을 찾아가다가 길이 막혀 있어서 10분 정도 돌았다. 내려오는 길에 비가 쏟아진다. 쏟아지는 강도가 높아지더니 우산을 써도 별 소용없을 정도로 거세게 쏟아진다. 루멜리 히사르 입구를 지나서 적당한 식당에 들어갔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고 있다. 식당엔 손님들이 가득했다. 혼자라고 했더니 계산대로 쓰고 있던 테이블 한 편으로 안내해 준다. 메뉴판을 건네주고 간단한 메뉴만 주문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 토스트 한 접시와 오믈렛 그리고 오렌지 주스 한잔을 시켰다. 신발에 물이 들어가서 양말까지 젖어버리는 바람에 오후 내내 걸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조금 후 음식이 나왔고 기대보다 더 맛있었다. 가장 다행스러운 점은 음식을 다 먹을 때쯤 비가 그쳤다는 것이다.
Note. 트램, 버스, 배 모두 이스탄불 카르트로 이용할 수 있다. 요금은 대략 10리라 전후 였던 듯 하다.
점심을 먹고 루멜리 히사르에 들어가는 입구로 향했다. 밖에서 보는 성의 모습은 기대한 부풀리게 했다. 거의 온전한 모습의 성곽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쪽으로 들어와 보니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공사 중이었다. 성 안쪽에 있는 계단들을 따라서 가장 높은 곳의 탑까지 갈 수 있었다. 조금 올라가니 성벽 너머서 바다 모습이 들어온다. 책에서 읽은 것처럼 이 성벽에서 중세 베네치아 공화국을 위시한 무역선들을 공격할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성 내부에서 본 바다는 상당히 넓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용된 것처럼 보이는 대포들이 성 안쪽에 주욱 늘어서있다.
계단을 타고 성 꼭데기 타워 아래까지 올라갔다. 타워는 잠겨있었다. 올라가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성벽을 위시한 성의 모든 타워들은 공사 중이었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성벽이나 타워를 오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역사를 따라서 이곳에 온 사람으로 과거 이 성벽의 역할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웠다. 내려오는 길에 성 안쪽에 사진 찍기 좋은 공간에서 셀카를 몇 장 찍는 것으로 루멜리 히사르에 대한 관람을 마쳤다.
내 이스탄불 여행에서 꼭 봐야 할 두 개의 목적을 다 달성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루멜리 히사르.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두 나라의 유물을 관리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엔 안타까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과거의 흔적을 가까이서 볼 수 있던 것에 만족한다.
신발에 물이 들어가서 걷는것이 불편하다. 곧바로 호텔로 돌아가서 재정비 후 다시 나올까 하다가 가는 길에 있는 해군 박물관에 들렀다가 그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 해군 박물관은 중세시대보다는 근현대 위주의 전시물들이 많았다. 술탄 시대의 전시물들은 술탄이 이용했던 화려한 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해군의 역사를 둘러볼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돌아보다가 걷는 게 너무 불편해져서 호텔로 돌아왔다. 젖은 상태의 신발을 오래 신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는 길이 좀 불편하긴 했지만, 호텔로 돌아와서 신발을 벗고 발을 씻고 나니 생각보다 상태는 괜찮았다.
한 시간쯤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근처에서 먹을까 하다가 시장 골목을 보고 이것저것 사서 맥주 한잔하고 호텔서 먹거리 했다. 다행히 사 온 음식들은 괜찮았다. 호텔 냉장고가 가득해졌다.
Note. 이날 시장에 가니 사람들이 온통 TV를 둘러쌓고 있었다. 뭔 일인가 싶었나 했더니 다들 축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거의 우리나라 월드컵 16강 구경하는 것 같은 분위기다. 응원하는 팀이 우승했는지 폭죽이 터지고 기쁨에 넘치는 사람들이 시장 골목에서 함성을 내지른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갈라타사라이가 이날 우승했다고 한다.
Note. 내가 묶은 호텔은 오르막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호텔방에 있는 물도 별도로 요금을 받는다. 아침 뷔페에 음료수를 따르러 가니 시키면 가져다준다고 한다. 그리고 테이블을 보니 음료수에 가격표가 붙어 있다. 주변에 시장이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체크아웃 시 계산서를 보니 물을 제외한 별도의 요금은 부과되지 않았다. 아침 뷔페 음료수는 호텔비에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